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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슈퍼리치] '판은 내가 이끈다'...바둑판서 배운 재계 승부사들
아마 5단 장평순 교원그룹 회장
프로기사들 대국 복기하며
새로운 사업 아이템 구상하기도

아마 4단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
바둑 실력 만큼 치밀하고 완벽한 경영



[특별취재팀=성연진ㆍ민상식 기자] 사회는 냉혹하다. 올라올 때까지 기다려줄 만한 참을성도, 내려간 이를 끌어올려줄 만한 따뜻함도 쉽게 찾기 어렵다. 변화는 빠르고 요구는 늘어난다. 하루 앞이 결정되지 않은 세대. 웹툰에서 출발한 ‘미생’이 많은 직장인들의 퇴근 후 고단함을 달래주고 있다. 원작자 윤태호 작가는 차가운 현실의 88만원 세대를 생(生)과 사(死)가 결정되지 않은 상태인 미생에 비유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 세대와 지위를 아우르는 주제다.

꼼수, 대항마, 패착 등 바둑 용어인지도 몰랐던 말들이 실생활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면 결국 하루하루란 가로 세로 각각 19줄 바둑판 위에서의 움직임과 닮아 있다. 특히 상대의 수를 읽어내는 원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과 다르지 않다.

88만원 세대와 대척점에 있는 듯하나, 많은 재계 총수들이 바둑을 즐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잡생각을 없애고 집중력을 기르는 이 정신 스포츠는, 아버지와 마주앉아 판을 읽는 법을 자연스레 익힌 ‘인생과 경영 개론서’이기도 했다.

물론 장그래와 재계 총수가 바둑을 배우고 대하는 법은 판이하게 다르다. 프로바둑기사를 자택으로 불러 함께 바둑을 즐기고, 두둑한 사례금(?)마저 챙겨주는 총수들의 바둑은 스트레스를 비워내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생에서 완생을 향해 가는 방향은 모두 다 같을 것이다. 바둑에서 인생과 경영도 배우는, 바둑 사랑이 남다른 재계 부호들을 모아봤다.


▶‘형세 판단’ 판을 읽어야 이긴다=범 LG가에는 유독 바둑광이 많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종종 곤지암리조트로 프로기사를 초청해 대국을 치른다. LS가의 구자홍 회장(아마 6단)도 이에 뒤지지 않는 바둑 애호가다. 

개인 홈페이지에 바둑사랑이라는 코너가 따로 있을 정도다. 


구 회장은 평소에 “바둑은 부분 전투에서 출발해 바둑판 전역으로 전투가 확대된다. 그래서 처음부터 바둑판 전체를 염두에 두고 돌을 놓아야 한다. 경영도 그런 것이다”라고 말해왔다.

구 회장의 아내와 아들 역시 상당한 바둑 실력을 갖추고 있다. 일년에 한두 차례 프로기사들과 바둑을 두기도 한다.

구 회장은 1997년부터 ‘꿈나무 프로젝트’란 이름으로 어린 바둑기사 후원 활동을 하고 있으며, 이세돌 9단과 김지석 9단 등 스타 기사들이 후원을 받았다. LG그룹과 LS그룹의 사내 바둑 대회를 만든 것도 그다. 경기고등학교의 동문 바둑대회도 구 회장의 작품이다. 바둑대회 후원은 국내외를 가리지 않는다. 2011년부터는 LS가 진출한 베트남에서도 바둑 챔피언십을 후원하고 있으며, 러시아 LG 바둑대회를 연 적도 있다.

구 회장은 “타 지역은 일본 영향을 받아 바둑을 고(GO)라고 표현하나, 러시아는 한국식 표기인 바둑(BADUK)을 쓴다”며 “바둑 활동이 외국 문화와 우리 문화의 자연스러운 융화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바둑을 ‘고’가 아니라 ‘바둑’이라 칭한 이 일화는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가 외국 바이어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바둑을 가르치는 장면에서도 활용되기도 했다.

바둑판의 배움을 경영에 접목한 이는 또 있다. 지금은 정치인으로 변신했지만 안철수 전 안랩 CEO(아마 5단)도 바둑 사랑이 남다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둑책 수십권을 탐독한 후, 비로소 대국에 나서며 바둑을 배웠다는 그는 저서 ‘영혼이 있는 승부’에서 바둑에서 배운 경영원리를 언급하기도 했다.

바둑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경영원리로 구 회장과 같은 형세판단을 꼽았다.


안철수 의원은 “바둑은 부분적 이익보다 전체 국면을 봐야 한다”면서 “바둑이 그러하듯 인생이나 사업도 결국은 장기전”이라고 말했다.

또 “요소를 선점해야 바둑이 편해진다”면서 “선점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에, 회사가 어느 정도 성장한 후 관련 있는 영역으로 조인트 벤처를 만들어 요소를 지켰다”고 밝혔다. ‘선수(先手)는 뺏기지 말라’고 바둑에서 배운 셈이다.


▶‘복기’ 다음을 준비하기 위한 훈련=한국의 자수성가 1조 부호에 이름을 올리며 주목받은 구몬학습의 장평순 교원그룹 회장도 아마 5단의 실력을 갖춘 바둑 애호가다. 시간이 생기면 바둑 채널을 보거나 기원에 가곤 한다. 프로기사들이 내놓는 새로운 수를 연구하면서 사업을 구상한다. 반면 골프는 연습장에 갈 시간이 없어 치지 않는다.

그는 비슷한 실력의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과 가끔 대국을 하며 친해졌다. ‘방문 판매’를 업으로 삼은 영업맨 장 회장과 윤 회장이 경영자로서 통하는 바가 많았을 것이란 후문이다. 사업을 구상하거나 그룹의 변화를 모색할 즈음 반상 앞에 앉는 것도 닮았다. 실제 윤 회장은 웅진그룹의 법정관리 기간에 매일같이 바둑을 두며 마음을 달랜 것으로도 전해진다.

결과에 승복하고 다음을 준비하기 위한 바둑의 ‘복기’와 닮아있다. 이미 치른 대국을 다시 점검하는 복기는 이긴 것보다 진 것에 대한 공부를 하는 것으로, 자기반성을 바탕으로 한다. 남을 탓하기보다 자신의 잘못을 깨우치는 과정인 셈이다.

이때문에 재계에는 애기가(愛璂家) 부호들이 많다.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 회장의 바둑 실력은 아마 4단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기풍은 치밀해서 좀처럼 실수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재계 유일한 1세대 경영자인 그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꼼꼼한 경영자로 소문이 나 있다. 2011년 신동빈 회장에게 그룹 회장직을 맡기고 총괄회장직으로 물러나기 전까지 롯데호텔 집무실에서 20여개 계열사의 보고를 직접 받고 문제점을 꼬집어나가며 임원들에게 호통을 쳤던 것으로 유명하다. 



아마 4단 강명주 지지옥션 회장
경매 정보지 만들 당시 주변선 실패 예상
정보지에 등기부등본 첨부 등 妙手로 평가

아마 4단 이구택 포스코 前 회장
대우조선해양 인수합병 실패 불구
자율적 시스템 도입 등 능력 인정




신 총괄회장은 올해 통산 73번째 우승컵을 차지한 ‘불멸의 승부사’ 조치훈 9단의 오랜 후견인이기도 하다. 인연은 무려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 9단은 당시 20살이던 형 조상연 5단과 함께 일본에 바둑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먹고 자고, 바둑 수업료까지 부담하기에 형제는 가난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동포모임에서 만난 신 총괄회장을 무턱대고 찾아갔고, 이 자리에서 그는 매월 1만엔의 후원을 약속했다. 1960년대는 일본의 프로바둑이 세계를 제압하던 때였다. 바둑 애호가인 신 회장은 바둑 유학을 온 한국 소년을 기꺼이 돕기로 한다. 조치훈 기사는 결국 11세 때 최연소로 데뷔를 하고 1980년 명인 자리에 오른다. 신 회장은 당시 TV 실황 중계로 일본 최강자 오타케 히데오를 꺾고 명인 타이틀을 차지한 그의 대국을 끝까지 지켜본 것으로 전해진다. 조 9단의 활동무대는 일본이지만 국적은 여전히 한국이다.

김동녕 한세예스24홀딩스 회장(아마 4단)도 소문난 바둑광이다. 그는 대한바둑연맹의 고교동문전, 대학동문전 바둑 대회를 후원하고 있다. 김 회장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바둑을 처음 접했다. 지금처럼 TV나 게임 등 놀거리가 없던 시절, 바둑은 공부 잘하는 친구들의 취미였다. 바둑에 푹 빠진 그는 경기고에 진학하면서 바둑 스승이자 친구를 만난다. 2011년 은퇴한 홍종현 9단이다. 홍 9단과 그는 경기고에 이어 서울대까지 함께 진학하면서, 셀수 없는 대국을 치른 것으로 전해진다.

▶‘아생연후살타’, 나부터 살펴야 한다=지난 2009년 1월 당시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재계 총수들을 만난 자리에서 현금을 풀어 투자에 나설 것을 당부했다. 2008년 하반기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북미발 금융위기가 한국 경제를 흔들던 때였다. 당시 이 자리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바둑에서의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라는 표현을 들어 응수했다.


최 회장은 “SK의 화두는 생존”이라며 “지금은 금융권이 어렵기 때문에 투자시기를 놓고 저울질해야 한다. 바둑에서도 아생연후살타란 말이 있듯이 먼저 살고 나서 공격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바둑은 돌 하나하나가 승부를 가름한다. 그만큼 순간의 의사결정이 중요한 스포츠다.

삼성그룹의 사장단은 재작년 ‘바둑에서 배우는 경영의 지혜’란 특강을 듣기도 했다. 강의를 맡은 정수현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는 “바둑에서 돌 하나 놓는 순간순간이 의사결정인데, 이를 잘하려면 목표를 분명히 해야 하고, 의사결정의 각 대안에 대한 미래 결과를 예측하고 이를 토대로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빠른 포석으로 ‘제비’라 불리던 조훈현 9단이 서봉수 9단이라는 라이벌의 등장으로 ‘전신(戰神)’이란 별명이 더해졌다”면서 “영원한 강자는 없고, 천적이 출연해 생존에 위협을 느끼면 스스로 스타일을 바꿔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도 바둑을 예로 들어 경영 철학을 알린 바 있다.

이 회장은 2002년 사장단 회의에서 “21세기는 천재들이 먹여살리는 시대”라며 “바둑 1급 열 명이 머리를 맞대도, 바둑 1단 한 명을 못 당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삼성의 ‘S급 인재’ 발굴이 가속화됐고, 성과에 따른 보상 격차도 커졌다.

▶악수와 묘수는 가까이 있다=강명주 지지옥션 회장(아마 4단)은 ‘여류 대(對) 시니어 대항전’을 8년 연속 후원하고 있다. 경매정보 제공업체인 지지옥션은 경기도 가평군에 바둑 수련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펜션형 산장도 운영하고 있다.

강 회장은 고려대 재학 시절, 대학신문에 시사만화 ‘타이거(Tiger)’를 연재했다. 학보사 간사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지지옥션의 전신인 경매 정보지를 만들었다. 당시는 정보지가 없던 때였고, 뭇사람들은 그가 악수(惡手)를 뒀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지지옥션이 했던 광고없는 신문, 경매물건 정보에 등기부등본 첨부 등은 결국 묘수(妙手)가 됐다는 게 안팎의 평가다.

강 회장은 최근 경매정보 제공업에서 ‘경매펀드’라는 새 분야로 사업 영역을 넓혔다.

이구택 포스코 전 회장(아마 4단)도 바둑에 있어서 밀리지 않는다. 그는 포스코의 6대 회장으로, 지난 2008년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한 뒤, 2009년 사임했다. 당시 장고(長考) 끝에 둔 한 수였던 대우조선해양 인수합병(M&A)을 실패하긴 했으나 CEO 이구택의 능력을 의심한 이는 없었다.

특히 끊임없는 혁신을 강조하며 자율적인 시스템을 도입한 것은 바둑의 도전의식과 꼭 닮았다는 평가다. 40년 포스코 맨으로 최고 자리에 오른 이 회장 외에 우리은행맨으로 우리금융지주 회장 자리에 올랐던 이팔성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도 금융계 대표적 바둑 애호가다.

yjsu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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