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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슈퍼리치] ‘스페인 계단’ 논란 伊 … 명품업체 문화재 복원 메세나 혹은 상술?
[헤럴드경제=슈퍼리치팀 홍승완ㆍ민상식 기자] 유럽 왕실의 경직된 삶에 싫증이 난 앤 공주가 “보통 사람들처럼 즐겁게 살고 싶다”며 단발머리를 뽐내며 걸터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던 장소. 로맨스 영화의 대명사가 된 고전 ‘로마의 휴일’의 명장면으로 유명해진 이탈리아 로마 관광지 ‘스페인 계단’이다.

스페인 광장(Piazza di Spagna)에서 트리니타 데이 몬티 교회를 잇는 로마의 대표 관광지인 이 계단을 두고 얼마전 논란이 벌어졌다. 계단이 1년여간의 보수 후 재개장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 이탈리아의 한 거부가 관광객들로 부터 계단을 보호하기 위해 울타리를 치자고 주장하고 나서면서다. 

영화 로마의 휴일로 유명해진 스페인 계단. 최근 1년여의 보수공사를 마치고 재개장을 앞두고 있다

논란에 불을 붙인 것은 세계적인 초고가 쥬얼리 브랜드 ‘불가리(Bulgari)’의 파올로 불가리 회장.

파올로 회장은 창업주인 소티리오스 불가리의 증손자로 현재 불가리를 이끌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1970년대에 아버지인 죠르지오 불가리로부터 형, 동생 등과 함께 재산과 가업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형인 지아니가 1980년대 후반 주식을 팔고 가업에서 손을 완전히 떼면서, 현재는 동생인 니콜라와 함께 ‘패밀리 비즈니스’를 이끌어 오고 있다. 포브스가 평가하는 현재 파올로의 자산은 13억 달러, 우리 돈 1조5000억원 선이다. 동생 니콜라 역시 12억 달러의 자산을 보유한 거부다.

파올로는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스페인 광장에 울타리를 쳐야 한다고 주장해 논란을 낳았다. 울타리를 쳐서 사람을의 접근을 아예 막자는 주장이다. 

뜬금없는 이야기 같지만 이유가 있다. 계단의 보수 비용 170만 달러를 ‘불가리’사가 부담했기 때문이다. 1725년 지어진 스페인 계단은 영화 ‘로마의 휴일’ 이후 세계적인 명소가 되면서 지난 수십년간, 매년 엄청난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곳이 됐다. 수백만의 인파가 다녀만 가도 계단이 더러워 질텐데, 관광객들이 ‘영화처럼’ 계단에 앉아 아이스크림과 샐러드를 먹거나 커피를 마시는 등 '손때'를 타며 계단이 많이 더러워졌다. 경비원들이 퇴근하는 자정 이후에는 술판을 벌이는 관광객도 적지 않았다. 중국인 관광객들이 늘어난 이후에는 계단의 돌조각을 떼어가거나 유성팬으로 이름을 써놓고 가는 일도 크게 늘었다. 때문에 이탈리아 문화재청이 계단에 보수에 나선 것이다. 

파올로 불가리 회장. 그는 현재 동생과 함께 불가리를 이끌고 있다.

파올로 회장이 단순히 ‘수리비용’이 아까워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계단 보수 자체가 아주 어렵기 때문이다. 엄청난 인파와 그들이 남기는 각종 오물 때문에 계단이 원래의 백옥색을 잃고 탁한색으로 변했는데, 이를 보수하려면 계단을 아주 정밀하게 살짝만 ‘갈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세밀한 수작업으로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한다.

그는 “전문 복원가들이 1년이 넘는 시간동안 어려운 작업을 거쳐 겨우 계단을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면서 “계단을 아이스크림은 물론 커피, 와인, 껌 등 그 어떠한 것들로 부터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또 “뭔가 엄격한 룰을 만들어 놓지 않으면, (스페인 계단은) 다시 야만적인 관광객들로 인해서 이전과 같은 상황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다못해 취객들이 활개를 치지 못하게 심야시간만이라도 계단 인근에 울타리를 치자는 게 그의 입장이다. 

전세계 관광객으로 발 디딜틈이 없던 복원 전의 스페인 계단

하지만 파올로 회장의 주장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이 많다. 밟지 못하는 계단이 관광지로써 무슨 의미가 있냐는 이야기다. 미국에서 온 관광객 린 갓프리(여성) 씨는 NBC와의 인터뷰에서 “그런 방식이라면 파올로 회장은 자신이 살고 있는 수백년 된 저택에선 밥도 먹지 말아야 한다”면서 “울타리를 칠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경비원을 두고, 더 많은 표지판을 설치해 관광객들이 신중하게 행동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마의 일반 시민들까지도 파올로 회장의 생각이 지나치다는 쪽이 많다. 여론이 나빠지자, 불가리의 전문경영인인 CEO 장-크리스토프 바빈 까지 “세계의 어느 문화재나 야만적이고 접근으로부터 완전하게 막을 수는 없다”이라면서 파올로 회장이 주장하는 방법이 다소 극단적이라는 입장을 우회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파올로 회장의 발언이 도마위에 오르면서, 한켠에선 문화재 보수에 참여하는 명품업체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도 나온다. 이들이 문화재 보수에 돈을 내고서는 지나치게 ‘생색’을 내고 있다는 비판이다.

이탈리아의 경우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문화 부문의 정부예산이 크게 줄어든 상황이다. 10년전만 해도 27000만 달러가 넘던 문화재 보수 예산이 2013년에는 7000만 달러를 조금 넘는 수준으로 급감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명품업체들이 ‘메세나(mecenat·기부)’ 형태로 문화재 보수에 참여하고 그간 나섰다.

예컨데 ‘펜디(FENDI)’의 경우는 트레비 분수를 비롯해 로마 4곳의 분수를 복원, 보수 하는 프로젝트를 2013년부터 후원했다. 펜디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고 있던 세계적인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가 직접 등장해 비용 270만 달러를 모두 부담하겠다고 밝혔었다. 트레비 분수는 이후 17개월간의 보수·복원을 마치고 지난해 11월부터 다시 손님을 맞아 들이고 있다. 현재도 공사가 진행중인 로마의 대표 건축물인 ‘콜로세움’의 복원에는 명품 신발 브랜드인 ‘토즈(TODS)’가 참여했다. 우리돈 300억원이 훌쩍 넘는 2500만 유로 비용을 모두 부담했다. 고가 청바지 브랜드인 디젤(DIesel)의 경우는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고건축물인 ‘리알토 다리’의 복원 비용 680만 달러를 지원했다. 

트레비 분수 복원 현장에 설치된 차단막. 자금을 댄 펜디의 로고가 새겨져 있다.

많은 명품 업체들이 나서자 ‘돈없는 정부’도 화답했다. 이들에게 다양한 형태의 세제 혜택과 행정적 편의를 제공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문화재 복원 프로젝트에 참여한 브랜드들이 매년 상당한 세제 혜택을 받고 있다는 게 현지 언론들의 분석이다. 게다가 명품 업체들은 상당한 마케팅 효과도 얻고 있다. 대놓고 하는 ‘쇼케이스’나 ‘광고’의 효과가 점점 떨어지는 데 반해, 오히려 이런 활동이 브랜드의 이미지를 품위있고 세련되게 유지해 결과적으로 더 많은 고객들의 지갑을 열게 만들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특히나 중국이나 동유럽, 남미 등에서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는 잠재 고객들에게 브랜드를 ‘공신력 있는 공공복원사업에 참여하는 전통있는 명품’으로 포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토즈와 팬디 모두 각각 콜로세움과 트레비 분수 복원 과정을 광고물로 활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처럼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참여해’, ‘충분한 효과를 얻고 있으면서’도 정작 뒤에서는 돈벌이만 생각하고 있다는 게 명품 업체들의 문화재 복원 지원에 대한 비판의 핵심이다. 실제로 얼마전에는 토즈의 CEO이자 회장인 디에고 델라 발레(Diego Della Valleㆍ자산 17억5000만 달러)가 콜로세움 복원 사업을 지원하면서, 참여 조건으로 향후 콜로세움의 입장권의 토즈의 로고를 인쇄할 수 있게 해달라고 추가로 뒷거래를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이탈리아인들에게 거세게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콜로세움 입장권은 매년 600만장 이상이 팔리는 데 그 마케팅 효과만 상당하기 때문이다. 펜디의 경우는 트레비분수의 복원후 그곳에서 패션쇼를 열기도 했다. 

토즈의 디에고 델라 발레 회장. 콜로세움 복원을 지원하면서 향후 입장권에 토즈의 로고를 박아 달라는 뒷거래를 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이탈리아 인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물론 반대 의견도 많다. 이탈리아의 전통과 문화에 힘입어 돈을 번 회사들이 이탈리아의 문화유산 복원에 참여하는 것을 굳이 나쁘게 볼 필요 있냐는 의견이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모든 활동에 ‘효과’를 기대하는 게 당연하다는 입장이다. 뉴스위크는 비영리 단체 ‘위 아 히어 베니스(We Are Here Venice)’의 설립자 제인 다 모스토의 말을 빌어 “애초에 이탈리아 문화재의 상당수가 그렇게 만들어졌고, 심지어 교회들 까지도 천국에 자리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건설 자금을 모았다”고 보도했다.

swa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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