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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슈퍼리치]억만장자 패션 디자이너 5인의 공통점은?
[헤럴드경제=슈퍼리치팀 민상식 기자ㆍ이채윤 학생기자] 패션쇼 런웨이에서 수많은 시선을 한 몸에 받는 패션 디자이너는 부(富)와 명예가 따라오는 직업 중 하나이다.

전 세계적으로 흥행몰이를 한 패션 스타일을 선보인 일부 디자이너들은 단숨에 글로벌 억만장자 대열에 들어서기도 한다.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 등이 대표적이다.

미국 순위 사이트 더리치스트는 최근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패션 디자이너 5인을 선정했다. 자신의 이름을 딴 글로벌 브랜드의 성공과 함께 자산 10억달러(1조1450억원) 이상을 보유한, 이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바로 ‘패션의 본고장’ 이탈리아(Italy) 출신이라는 점이다. 
 
발렌티노 가라바니 [출처=차이나데일리]

5위. 발렌티노 가라바니(Valentino Garavaniㆍ84) - 자산 15억달러(약 1조7000억원)

네덜란드ㆍ스위스ㆍ그리스 등 유럽왕가의 웨딩드레스는 모두 한 명의 패션디자이너 손에서 나왔다. 바로 ‘패션계의 롤스로이스’라 불리는 발렌티노 가라바니다.

가라바니는 1932년 이탈리아 보게라에서 태어나 파리 에콜 데 보자르와 파리 오트 쿠튀르 조합에서 공부했다. 이른바 패션계의 실크로드를 걷던 그는 당시 디자이너 선망의 도시인 파리를 뒤로하고 고국으로 돌아와 사업을 시작했다.

발렌티노 하우스를 연 것은 1960년이었다. 이어 10년도 채 되기 전 세계적인 간판 디자이너 자리에 오른다. 1968년 재클린 케네디가 그리스 선박왕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와 재혼할 당시 입었던 투피스 미니 웨딩드레스를 디자인하면서부터였다.

재클린의 드레스는 무릎 위로 살짝 올라온 주름 스커트였다. ‘웨딩드레스는 길어야 한다’는 관념을 깬 첫 가라바니의 드레스는 그해 전세계 패션 잡지에 빠지지 않고 실렸다.

이후 ‘로열 패밀리’의 웨딩드레스는 가라바니 전담이 됐다. 그리스 마리샹탈 밀러 왕세자빈을 비롯해 네덜란드 막시마 왕비의 웨딩드레스까지 모두 가라바니 손을 거쳤다. 그의 이름값에 세상에 단 하나뿐인 드레스로 알려지면서 가격도 천문학적으로 뛰었다. 당시 영화배우 키이라 나이틀리가 입은 미니 웨딩드레스의 경우, 현지 언론이 약 5만파운드(약 7000만원)라고 보도한 바 있다. 
 
2013년 스웨덴 매들린 공주 웨딩드레스(위쪽)와 가라바니의 실제 스케치 [헤럴드경제 DB]

가라바니는 자신의 화려한 라이프 스타일과 고급 취향을 쿠튀르 드레스에 표현했다. 로마ㆍ파리ㆍ 런던ㆍ뉴욕 등 저택을 두고 전 세계를 누비며 사는 제트족(Jet-Setter)인 그는 앤디 워홀 같은 유명작가와 교류하며 실제 쿠튀르 같은 화려한 생활을 즐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깜짝 출연하고, 유명 여자배우들을 레드카펫에서 에스코트하며 당당하게 포즈를 취하는 그는 매스컴에 가장 많이 나오는 디자이너로 꼽히기도 했다. 가라바니는 2008년 S/S 쿠튀르 컬렉션을 마지막으로 화려하게 은퇴했다.
 
스테파노 가바나(왼쪽)와 도미니코 돌체 [출처=핀터레스트]

공동 3위. 도미니코 돌체(Domenico Dolceㆍ58)ㆍ스테파노 가바나(Stefano Gabbanaㆍ53) - 자산 각각 16억1000만달러(약 1조8000억원)

패션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파트너십으로 불리는 돌체 앤 가바나 디자이너인 도미니코 돌체와 스테파노 가바나가 공동 3위에 올랐다. 이 둘의 인연은 1980년대 초 돌체가 일하던 패션하우스에 가바나가 이력서를 넣으며 시작됐다. 돌체는 가바나에게 패션 스케치를 가르치며 친분을 쌓아나갔다.

“우리는 아주 다른 두 개의 관점에서 시작한다. 그가 왼쪽에서 시작하면 나는 오른쪽에서 시작하는 식이다. 그렇게 우리는 가운데서 만난다”는 가바나의 말처럼 외모와 성향이 정반대인 두 디자이너는 서로에게 매혹됐다. 1982년 동거생활을 시작한 이들은 두 사람의 이름을 딴 돌체 앤 가바나 스튜디오를 열었다.

“패션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패션이 우리를 쫓아온다”는 뚜렷한 패션철학은 같았다. 이들은 1986년 3월 첫 여성복 컬렉션 ‘현실의 여성(Real Woman)’을 발표하면서 곡선의 코르셋 드레스와 레오파드 프린트의 코트를 선보였다. 이어 스타일에서 뚜렷하게 풍기는 섹슈얼함은 곧바로 돌체앤가바나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가십과 유혹이 많은 업계에서 ‘동성애 커플’이라는 이유로 눈길을 끌었던 이들은 2005년 결별을 선언했다. 당시 매체들은 이들의 결별이 브랜드 매출 급락으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했지만, 이 둘은 현재까지도 사업 파트너로서 관계를 이어가며 창조적인 컬렉션을 선보이고 있다. 
 
렌조 로소[출처=더블유매거진닷컴]

2위. 렌조 로소(Renzo Rossoㆍ61) - 자산 35억달러(약 4조원)

2위는 괴짜 최고경영자(CEO)로 유명한 렌조 로소다. 그의 또다른 별명은 ‘데님 청바지의 아버지’다. 1955년 이탈리아 북부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로소는 미군 부대에서 버린 식료품과 군수품을 주워 팔아 용돈을 마련했다. 옷 살 돈이 없어 집에서 청바지를 만들어 입던 것이 ‘디젤(Diesel)’의 시작이었다.

1978년 로소는 자신이 모은 돈과 지인의 돈을 빌려 자신이 일하던 회사 ‘몰텍스(Moltex)’의 지분을 구입, 디젤로 회사명을 변경했다. 이어 오랫동안 입은 듯한 청바지를 최고급 프리미엄 스타일로 부활시켜 80~9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2002년 모든 패션 브랜드를 통합해 ‘OTB그룹‘을 설립한 로소는 베니스 브레간체에 본사를 거창하게 짓는가하면 30분 거리의 바사노 델 그라파 마을에 대저택을 지어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다.

와인 애호가인 그는 1994년부터 ‘디젤팜’이라는 이름의 와이너리를 직접 운영하는가 하면, 최근에는 올리브 오일 브랜드까지 런칭했다.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은 그는 특히 각종 보수공사에 직접 투자하기도 했다. 2012년 베니스 대운하 4대 다리 보수공사에 600만달러를 건네고, OTB재단을 설립해 아프리카에 1200만유로를 기부하기도 했다. 
 
조르지오 아르마니 [출처=더페이머스피플닷컴]

1위. 조르지오 아르마니(Giorgio Armaniㆍ82) - 자산 71억달러(약 8조1000억원)

1934년 이탈리아 북부 피아첸차에서 태어난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의과대학을 다니던 의학도였다. 그러나 의학에 별 뜻을 품지 못한 그는 학업을 포기하고 백화점에서 디스플레이 일을 하며 패션계에 발을 들였다.

이탈리아 니노 세루티사에서 경력을 쌓은 그는 1974년 자신의 이름을 내건 브랜드 ‘조르지오 아르마니’를 선보였다. 아르마니는 1975년 첫 컬렉션에서부터 부유한 고객층을 겨냥한 우아한 컨셉의 의상을 내놓았다. 당시 그가 발표한 패드를 없앤 실용적인 디자인의 재킷이 엄청난 인기를 끌며 그는 단번에 밀라노 최고의 디자이너로 떠올랐다. 이후 1981년 젊은층을 겨냥한 ‘엠포리오 아르마니’와 스포츠웨어 ‘마니’라는 서브 브랜드를 각각 출시했다.

“패션이란 청결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작업”이라는 그에게 청결함은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를 의미한다. 이 때문에 아르마니 패션은 극도로 장식을 배제한 ‘심플함’과 ‘모던함’의 대표로 불린다. 복잡하고 화려한 디자인보다는 단순하고 질 좋은 소재 사용에 중점을 둔 것이다.

현재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신사복ㆍ숙녀복ㆍ유아복을 넘어 액세서리ㆍ향수ㆍ넥타이ㆍ보석ㆍ안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품군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아르마니는 지난 8월 퇴임을 앞두고 재단 설립을 감행했다. “아르마니의 미래를 책임질 재단을 설립한다”며 “회사의 자치와 독립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던 그의 결단은 가족 상속으로 일어나는 각종 분쟁을 원천봉쇄했다는 분석이다.

yoo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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